[이학영 칼럼] 이런 '전직 대통령'이 부럽다

입력 2023-03-07 17:32   수정 2023-03-08 00:30

선거에서 진 정치인치고 억울하거나 서럽지 않은 사람 없다지만, 지미 카터(98)는 팔자가 좀 더 기구했다. 미국 39대 대통령(1977~1981)을 지낸 그에게는 ‘실패한 정치 지도자’라는 수식어가 평생 따라붙었다. 재임 기간 중 미국 경제가 스태그플레이션(물가 급등과 경기 침체의 동시 진행) 늪에서 헤맸고, 반미(反美)로 돌아선 이란 등과의 대외정책에서도 실수가 불거졌다. 인기가 바닥으로 떨어졌고, 재선에 실패하면서 ‘2차 대전 이후 첫 단임 대통령’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연임 선거 경쟁자였던 로널드 레이건은 청중에게 “당신의 이웃이 실업자가 되는 게 경기불황이고, 당신이 일자리를 잃으면 경제공황이며, 지미 카터가 백수가 되는 게 경기회복”이라고 그를 야유했다. 보잘것없는 학력(조지아주 사우스웨스턴대 학사)에 남부 시골의 땅콩농장 주인이던 ‘아싸(아웃사이더)’를 워싱턴의 주류 정치인들과 언론은 대놓고 무시했다. 퇴임 이후 집 없는 빈민을 위한 해비타트(주거공간 확보) 운동에 앞장서고 중동 등 분쟁지역 평화 중재 활동에 나선 그를 향해 “본인과 미국을 위해 현직을 건너뛰고 곧바로 전직 대통령이 됐으면 좋았을 것”이라는 덕담성 조롱까지 나돌았다.

카터는 이런 모멸에 구차하게 자기방어를 하려고 애쓰지 않았는데도, 요즘 주류 언론과 학자들 사이에서 묻힌 업적을 재조명하는 작업이 활발하다. 그의 임기 당시 스태그플레이션은 2차 오일쇼크로 인한 세계적 현상이었으며, 대표적 매파 통화론자였던 폴 볼커를 중앙은행 총재(Fed 의장)로 발탁해 오히려 인플레 퇴치 작전에 과감히 나섰다는 재평가가 대표적이다. 전임자가 씨앗을 심은 덕분에 후임자인 레이건이 톡톡히 과실을 누린 건 경제 분야만이 아니다.

냉전시대 최대 적(敵)이었던 소련과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무너뜨리고 독일 통일 등을 이끌어낸 게 레이건 최고의 치적으로 꼽히지만, 이것 역시 ‘기초공사’의 주인공은 카터였다. 인류가 양보해선 안 될 최고의 가치로서 ‘인권’을 강조한 카터의 대외정책은 권위주의 철권통치체제 소련의 최대 아킬레스건을 사정없이 건드리며 내부로부터의 붕괴를 유도했다. 공산주의 압제에 항거하는 자유노조운동이 일어났던 폴란드를 취임 후 첫 방문 국가로 선택한 게 단적인 예다.

카터에게는 이런 업적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채 ‘뜨내기 대통령’ 평가를 받은 것보다 더 속상한 일이 있다. 같은 민주당 소속 후배 대통령인 빌 클린턴과 버락 오바마로부터 ‘투명인간’ 취급을 받은 것이다. 일류 대학을 졸업하고 엘리트 변호사·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해온 그들은 재선에 실패한 시골뜨기 카터를 ‘당을 망신시킨 창피한 존재’라며 외면했다.

그럼에도 그는 의연했다. 퇴임하기 무섭게 요란한 강연 활동과 자서전 집필 등을 통해 ‘업적’을 포장하며 큰돈을 벌어들인 대다수 역대 대통령의 길을 걷지 않았다. 오바마와 클린턴 부부가 고액 강연과 저술 등으로 최소 1억3500만달러(약 1755억원), 1억2000만달러(약 1560억원)를 각각 긁어모은 것과 특히 대조적이다.

1981년 퇴임과 동시에 인구 550명에 불과한 조지아주의 시골마을(플레인즈)로 귀향한 그는 “대통령직을 돈벌이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던 약속을 실천했다. 땅콩농사를 짓고 주일학교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치며 집짓기 봉사를 하고, 세계 각국을 돌며 인권과 평화,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의 소중함을 전파하는 일에 사명감을 갖고 전념했다. 허름한 옛집에서 살며 산책길에 만나는 동네 주민마다 이름을 정확하게 불러 경호원들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암 증세가 악화해 연명치료가 힘들어지자 자택에서 임종을 준비하는 호스피스 돌봄에 들어간 그에게 미국 언론이 주목한 것은 “시종일관 언행일치의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이다.

1970년대 베트남 전쟁 패전과 워터게이트 사건 등이 겹치면서 집단 증오와 분열, 비관주의에 빠져 있던 미국 사회에 ‘도덕적 가치와 자신감 회복’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실천을 위해 끝까지 노력한 지도자라는 것이다. 퇴임 후 정치 활동 대신 대민봉사에 헌신한 것 또한 “국민 통합과 화해에 기여하는 게 전직 대통령의 마지막 소명”이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런 전직 대통령을 가진 미국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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